조현욱
객원기자·과학평론가
한 강연회장에서 연사가 청중 중의 한 여성을 일으켜 세우고 말했다. “지금부터 당신에게 새빨간 거짓말을 하겠습니다. 당신은 매사에 긍정적이고 책임감이 있군요. 리더십이 있고 유머감각도 좋아서 사람들이 잘 따르고 부하들의 신뢰를 얻고 있습니다….” 연사가 여성에게 느낌을 물어보자 “기분이 좋군요”라는 대답이 나왔다. 여기서 연사가 말했다. “처음에 나는 ‘거짓말’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기분이 좋아요?”객원기자·과학평론가
이 이야기는 실화다. 인제대 서울백병원 정신과의 우종민 교수가 지난해 11월 KT 강연회장에서 ‘실험’해 보았다고 밝힌 사례다. 『우종민 교수의 뒤집는 힘』의 저자인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의 뇌는 현실과 언어를 구분할 능력이 없습니다. 분명히 거짓말이라고 전제한 칭찬을 들었는데도 당사자의 기분이 좋아진 것이 그런 예입니다.”
이를 확장해 ‘인간의 뇌는 현실과 언어를 구분할 능력이 없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는 것이 우 교수의 설명이다. “거짓이라는 것을 알면서 칭찬을 받는 사람과 진짜라고 믿고 칭찬을 받는 사람의 뇌를 비교한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칭찬을 받으면 뇌에서 쾌락을 관장하는 부위가 활성화되는데 이를 기능성 자기공명영상으로 촬영한 것이지요. 양자의 뇌에서 활성화되는 부위가 동일하다는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뇌는 현실과 언어를 혼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의학 분야에서는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사실이라고 그는 말했다. 게다가 뇌는 심지어 단순한 단어 몇 개의 조합에 노출된 것만으로도 큰 영향을 받고 이것은 행동의 변화로 나타난다는 사실이 심리학자들의 실험으로 확인됐다.
일본국립생리학연구소의 사다토 노리히로 교수팀은 2008년 사람의 뇌가 외부 자극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기능성 자기공명영상(fMRI)으로 촬영했다. 좋은 평판을 받을 때 활성화되는 부분(보라색)의 면적이 금전적 보상을 받을 때 활성화되는 부위(초록색)보다 더 좁은 것으로 나타났다.
1995년 뉴욕대학 심리학과의 존 바그 교수와 그의 동료들이 학생들을 대상으로 수행한 두 건의 실험을 보자.이들은 피실험자들에게 뒤죽박죽인 단어들을 다시 배열해 말이 되는 하나의 문장으로 만들라는 지시를 내렸다. 피실험자 절반에게는 “사람의·이다·피부·주름진”과 같이 노인과 관련된 단어를, 나머지 절반에게는 “사람의·이다·피부·부드러운”처럼 나이 듦과 관련이 없는 단어를 각각 제시했다.
문제는 모두 10개였고 피실험자들은 이것이 단어능력 테스트인 줄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바그가 측정한 것은 과제를 마친 학생들이 실험실을 나와 복도를 거쳐 엘리베이터까지 걸어가는 시간이었다.
피실험자들이 총 길이 7.5m인 이 구간을 걸어가는 데 걸린 시간은 평균 7.3초였다. 하지만 이는 노인과 관련이 없는 단어 문제를 푼 그룹에만 해당했다. 노인과 관련이 있는 단어가 들어간 문제를 푼 그룹은 이보다 1초 가까운 시간이 더 걸렸다.
젊은 대학생들의 뇌는 이 같은 단어들을 접하면서 현실과는 전혀 상관없이 “지금은 노인과 관계된 상황”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무의식적으로 걸음이 느려진 것이다.
두 번째 실험을 보자. 피실험자들을 두 집단으로 나누어 뒤죽박죽인 단어를 하나의 문장으로 만들라는 과제를 준 것은 앞서의 경우와 같다. 다만 절반에게는 ‘공격적’ ‘무례한’ ‘침입하다’ 등의 단어들을 흩어놓은 질문지를, 나머지 절반에게는 ‘공손한’ ‘양보하다’ ‘예의 바른’ 등의 단어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질문지를 제시했다.
한 명당 5분 정도의 테스트가 끝나면 복도를 지나 다른 연구실에 있는 실험진행자에게 가서 다음 과제를 받으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그 방에서는 다른 학생(사실은 실험 요원)이 실험진행자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해대고 있는 통에 마냥 기다려야 하게 만들었다.
한 학기 동안 진행된 실험의 결과는 놀라웠다. ‘무례’ 그룹은 평균 5분 정도 지나자 대화에 끼어들었다. 하지만 ‘예의’ 그룹은 82%가 제한시간인 10분간 대화를 방해하지 않았다. 언어는 고사하고 경향성을 띤 몇 개의 단어에 노출되는 것만으로 행동방식은 이처럼 달라진다 .
그뿐만이 아니다. 우리의 뇌는 현실과 생각의 차이도 잘 구분하지 못한다. 1998년 네덜란드 네이메헌 대학교의 아프 데익스터르후이스와 반 크니펜베르흐가 진행한 실험을 보자. 대학생 피실험자들을 둘로 나누어 한 그룹에는 대학교수가 되는 것과 관련한 속성을, 다른 그룹에는 축구 훌리건 의 속성을 생각하고 목록을 적어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시간은 5분이 주어졌다. 그 뒤 두 그룹 모두에게 “방글라데시의 수도는?” “1990년 월드컵을 개최한 나라는?” 등의 상식 문제 47문항을 풀게 했다.
그 결과 교수에 대해 생각했던 그룹은 평균 55.6%의 정답을 맞힌 반면 훌리건에 대해 생각했던 그룹의 정답률은 42.6%에 불과했다.
두 그룹의 지적 능력에는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똑똑하고 박식한’ 이미지에 대해 생각하느냐와 그 반대인가에 따라 문제해결 능력이 크게 달라진 것이다.
이 같은 이야기들의 결론은 명백하다. 우리의 뇌는 현실과 언어·단어·생각을 구분할 능력이 없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도 자명하다. 새해에는 긍정적인 말과 칭찬, 좋은 생각을 더 많이 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조현욱 객원기자·과학평론가 poemloveyou@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