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리어 강태영의 서비스 경영

Knowledge Box/Hotel managment

한국 호텔의 역사

Edward Kang 2010. 8. 27. 07:36

 

☆ 숙박의 역사

○삼국 초기 ∼ 고려시대

- 삼국사기 : 숙박시설에 관한 최초의 기록

- 신라, 소지왕 9년 '역관' : 관리들이 지방 순찰시 숙소로 이용

- 통일신라, 장보고 '신라방' : 당나라를 찾는 신라인의 숙소

- 고려시대<역참제> : 역마를 두고 공무로 왕래하는 관리에게 교통 및 숙박의 편의제공

 

○조선시대

- 고려시대의 역참제 지속 : 전국에 537개의 역

- 새로운 숙박시설인 <관> : 공무여행자, 관리를 위해 지방관위에 설치

- 하급숙박시설<원> : 점차 제한되어 점(주막)이 발달

 

○개항 ∼ 1950년대

- 19C말, 서구문물 유입, 외국인 방문 → 전통적 숙박시설의 변화

- 1888년 인천, <대불호텔> :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

- 1902년 서울 정동, <손탁호텔> : 최초의 근대적 호텔, 처음으로 프랑스 요리제공

 

☆ 호텔의 역사

○ 호텔

- 1889년 인천, <대불호텔> :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

- 1902년 서울 정동, <손탁호텔> : 최초의 근대적 호텔, 처음으로 프랑스 요리제공

 

○철도호텔 등장

- 1912년 <부산철도호텔> - 최초의 철도 호텔

- 1912년, 신의주 철도 호텔

- 1914년 <조선호텔> - 호텔이 처음으로 회의 장소로 이용

 

○상용호텔 등장

- 1936년 <반도호텔> - 최초의 상용호텔 (이 시기는 우리 국민의 여행이 제한되어 일본인, 외국인을 위한 시설)

 

○민영 호텔 등장

- 1952년, 대원호텔 - 최초의 민영 호텔

- 1955년, 금수장 호텔 - 지금의 소피텔 엠버서더의 전신

- 1959년, M.O.T가 직영한 호텔(서울반도, 조선, 지방의 8개 호텔 등 10개)

 

○1960년대의 호텔업

- 1961. 8. 관광사업 진흥법 : 시설기준이 우수한 호텔을 관광호텔로 지정

(메트로 호텔, 아스토리아 호텔, 뉴코리아 호텔, 사보이 호텔, 그랜드 호텔)

- 1963. (워커힐) - 최초의 휴양지 호텔

- 1965. PATA 개최. 서울 - 호텔의 중요성 인식

 

○1970년대의 호텔업

- 1970. 조선호텔 -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자본과 경영을 분리경영

- 1970. 관광호텔 등급제도, 관광호텔 지배인 자격시험제도 실시

- 1976. 서울 프라자 호텔

- 1978. Hyatt HTL, 부산조선비치호텔, 경주코롱호텔

- 1979. HTL 신라 개관을 시작으로 1979∼1980년 사이에 HTL 롯데, 경주조선호텔, 경주도큐호텔, 부산서라벌호텔, 서울가든호텔 등 대형호텔 개관

 

○1980년 이후

- 1983. Hilton HTL, 제53차 ASTA 개최

- '86,'88 이후 외국 체인 호텔 개관 - 스위스 그랜드 호텔, 인터컨티넨탈, 라마다 호텔, 롯데월드호텔 등

- 1990. 제주 신라가 resort hotel로 개관

 

 

★ 한국 현대호텔의 등장과 발전과정

철도의 개통과 더불어 1929년에 일본항공의 항공노선이 개설되어 교통이 더욱 편리해지자 1936년에 일본인 노구찌에 의해서 국내최초의 본격적 상용호텔(commercial hotel)인 반도호텔이 개관되었다. 반도호텔은 미국의 스테틀러호텔의 경영방식을 도입하였고, 일반대중을 상대로 영업을 한 당시 한국 최대의 시설 및 규모를 갖춘 호텔로 111개의 객실을 보유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일반인들의 여행이 극도로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일본인과 외국인을 위한 시설이 되었고 호텔사업도 일본인들에 의해 독점되고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후 호텔업은 한국인에 의한 본격적인 발전의 계기를 맞이했으나 해방직후의 사회혼란과 남북분단, 6·25동란 등으로 인하여 사실상 1950년 초까지 호텔업은 정체기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일제말에 총독부와 개인이 운영했던 철도, 열차식당, 역구내식당과 조선호텔, 반도호텔, 부산철도호텔 등은 해방 후 미군정에 의해서 관리되다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더불어 교통부로 이관되었다.

 

1953년 7월 휴전이 성립되고 많은 미군들과 군속 그리고 전후 UN한국부흥단 의원들이 한국을 방문하게 되자 점차 관광사업의 필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하게 됐으며, 이에 따라 정부조직에 관광과가 설치되었고 여행사와 민영호텔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1954년 교통부 육운국에 관광산업 촉진을 위한 관광과가 설치되었으며, 1957년에 세계관광기구(WTO)의 전신인 국제관광가구에 정회원으로 가입하였으며, 1958년 3월에 중앙 및 지방관광위원회가 설립되어서 본격적인 호텔산업의 발전에 활력을 불어넣기 시작하였다. 한편, 국내 최초로 대한여행사가 개업하였고, 민영호텔로는 1952년 대원호텔, 1955년 현 소피텔 앰베서더호텔의 전신인 금수장호텔, 1957년 해운대관광호텔, 사보이호텔 등이 각각 개관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관광사업은 정부의 정책적인 지원과 민간기업인들이 노력으로 외화획득 산업으로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하게 되었다. 1961년 8월 22일 관광진흥법의 제정과 다음해 제정된 시행령 및 시행규칙은 관광호텔들에게 획기적인 발전의 계기를 부여하였다. 특히 시설을 기준으로 우수한 호텔을 선정, 관광호텔로 분류하여 적극적인 행정지원을 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최초의 관광호텔로 선정된 호텔은 메트로호텔, 아스토리아호텔, 뉴코리아호텔, 사보이호텔, 그랜드호텔 등이었다.

 

1962년 6월 국제관광공사가 설립되면서 반도호텔, 조선호텔 그리고 지방 7개의 호텔들의 경영권을 인수하였다. 1963년 4월에 개관한 워커힐(Walker Hill)호텔은 한국 호텔산업에 있어 최초의 현대적인 호텔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호텔은 254개의 객실을 보유한 당시 동양 굴지의 리조트호텔로서 한국관광공사에서 운영하였다. 1965년 3월 국무총리실 직속으로 관광정책심의위원회가 구성되고 4월에는 제14차 PATA총회를 서울에서 개최하여 호텔업의 역할을 재평가하게 되었다.

 

1970년 3월 한국관광공사와 미국의 아메리칸항공사(America Airlines)가 합작투자한 조선호텔이 개관되어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자본과 경영이 분리되어 운영되는 호텔이 등장하게 되었다. 동년 5월에는 관광호텔 등굽화제도(특급, 1급, 2급, 3급)와 관광호텔 지배인 자격시험제도를 실시하여 호텔의 질적 수준과 경영의 전문성을 도모하였고 호텔서비스를 국제적 수준으로 향상하는데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

 

또한 정부에서는 관광호텔의 적극적인 개·보수를 촉진하기 위하여 개·보수에 소요되는 일부 자재에 대한 특별소비세를 면제해주는 세제상의 지원과 관광진흥개발기금으로 소요자금의 일부를 융자해주어 업자들의 투자부담을 덜어 주었다. 이러한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정책으로 관광호텔의 질적 및 양적 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관광객이 증가하였고 1973년에는 국내관광사상 유래가 없는 679,311명의 외래관광객이 입국하여 269,434 달러의 외화수입을 기록하게 되었다.

 

1972년 하반기부터 국내기업의 경제활동 무대가 급속히 국제화되어 가는 가운데 외국인 관광객이 급격히 증가하게 되었다. 정부는 미국 보잉(Boeing)사에 용역을 의뢰하여 "한국관광종합개발 기본계획"을 수립하여 한국관광의 미래상을 제시하였고 국제관광공사가 운영하던 워커힐호텔, 반도호텔, 대한항공사 등을 민영화하였다.

 

 

★ 일제침략하의 서울의 호텔

1910년 이전에 이미 인천 대불호텔과 스츄어드호텔이 영업을 하고 있었으며 서울에도 손탁호텔이 있었는데, 1910년 이후에는 더욱 많은 서양인의 내왕으로 구미인 상대의 호텔과 양식 여관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 그런데 이 당시에 세워진 호텔이나 양식 여관들은 많은 수가 철도국직영의 호텔 여관이었다는 점이 우선 특기할 만하다.

이제 1910년 이후에 세워진 호텔들을 살펴보면 1912년 7월에 부산 철도호텔이 철도국 직영으로 개업을 하였으며 1913년 4월에는 서울 철도호텔(조선호텔)이 착공되어 이듬해인 1914년 9월에 준공을 보아 동년 10월부터 영업을 개시하였다. 오랫동안 우리나라 호텔의 대명사처럼 불리워진 조선호텔은 처음에는 만철회사(滿鐵會社)가 건설하였으나 뒤에 철도국 직영이 되었다. 이 호텔은 대지 6,700평, 건평이 583평, 총실수가 69실, 여객수용수 106인, 공비는 당시 화폐로 84만3천원이 소요되었다. 이러한 규모는 당시로서는 동양일류의 호텔이라 할만 하였다. 이 호텔의 요리는 프랑스식을 주로 하였는데 재료의 정선과 요리법의 정묘함이 뛰어나므로 서양인들도 매우 찬탄하였고 이 호텔의 식당은 항상 붐볐다고 한다. 그리고 이 호텔의 뒤뜰에는 광무 원년(1897) 고종이 황제에 즉위할 때 천신지저에 고제(告祭)하기 위하여 건조한 원구단(**丘壇)이 있다. 이 호텔에 대하여 한가지 더 설명하면 1915년 4월 24일 전조선기자 대회가 이곳에서 열렸는데 이 일은 호텔에서 큰 규모의 정식 회합을 갖게된 시초였다. 1915년 8월 10일에는 금강산호텔이 영업을 개시하였으며 1918년 7월 1일에는 금강산 장안사호텔이 문을 열었다. 이 뒤에도 계속하여 사람이 많이 내왕하는 교통요지, 휴양지에는 호텔이 들어서게 되었는데 1929년 이전에 세워진 호텔들을 살펴보면 서울의 경성호텔 광화문호텔 중앙호텔 등이 있으며, 지방에는 부산의 동래호텔, 목포의 목포호텔, 신천온천의 온천호텔, 원산의 송도원호텔, 인천의 조양호텔 월미도호텔 등이 있었다. 그리고 1938년에는 서울의 반도호텔이 준공을 보게 되었다. 또한 1939년에는 오늘날의 여관규모보다 약간 큰 철근 콘크리트 5층 건물의 본정호텔과 임옥호텔 등이 서울에서 영업을 하고 있었다.

 

당시 호텔의 설비를 알아보면 방에는 욕실이 있는 방과 없는 방의 구별은 있으나 거의 욕실은 갖추어져 있었으며, 객실마다 탁상전화, 세면소가 있었다. 또한 호텔에는 큰 식당과 사교실이 있어 오늘날의 호텔 커피숍(coffee shop) 구실을 했으며 옥상에는 관망대도 있었고 식당에는 양식요리가 갖추어 있었다. 그리고 다른 시설로는 난방 · 방화 · 소화 · 급수시설과 자동차 주차장시설도 갖추고 있었다. 다음으로 당시 호텔의 숙박료에 대하여 살펴보면 지역과 등급, 실(室)의 구조, 장치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1929년의 조선호텔의 숙박료를 보면 구라파식(1실 1인)은 3원, 4원, 6원, 8원, 10원, 14원, 15원, 30원, 45원의 9등급의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미국식(1실 1인)은 9원, 10원, 12원, 14원, 16원, 20원, 21원, 26원이었다. 1927년의 부산 동래호텔의 경우 1박 2식에 7원, 서울의 광화문호텔은 식사가 제공되지 않고 5원 60전, 경성호텔은 역시 식사없이 5원 50전에서 8원 50전까지 실에 따라 다르게 받았다.

 

한가지 당시로서 특이한 것은 휴양지나 관광지의 호텔들은 실료를 숙박료의 의미보다 대실료(貸室料)를 받기도 하였다. 송도원호텔의 경우 실료를 시간으로 계산하여 받는 방도 있었는데 1시간에 2원∼3원을 받았다. 인천 월미도호텔의 경우는 대실료가 1일 A급 2원, B급 1원 50전, 7일 이상이면 매일마다 A급 2원, B급 70전, 14일 이상이면 A급 1원 50전, B급 60전, 21일 이상이면 A급 1원, B급 50전을 받았다. 침구는 1조를 하룻밤 제공하는데 50전을 따로 받았다. 그리고 당시 보통호텔의 식사요금은 아침 70전∼80전, 점심 1원, 저녁 1원 50전 정도였다. 당시의 보통 호텔의 요금은 특등, 일등 여관과는 별로 큰 차이가 없었다.

 

☆ 대불호텔과 손탁호텔

- 대불(大佛)호텔에 대한 기사를 『개항과 양관역정(洋**歷程)』에서 살펴보면

「…벽돌 3층의 이 양관(洋館)은 일본인 호리, 리기타로오(굴력태랑(掘力太郎))가 1887년 건축에 착수하여 1888년에 낙성시킨 것인데 얼핏보면 청관(淸**, 청국지계(淸國地界)) 같으면서도 기실(其實) 일본지계(日本地界) 첫머리라는데 또한 흥미가 있다. 일본지계 제일 첫 집이 호리씨 자택이고 그 당시 가장 하이칼라로 지었노라는 이 벽돌집이 둘째 번인데 외국인 특히 한국을 찾아드는 구라파인 혹은 미국인 상대의 양식호텔로 설계했다는 점에서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라고 표현되고 있다. 이 대불호텔의 영업이 번창(繁昌)하게 되자 바로 길건너의 청국인 이태(怡泰)라는 사람 역시 외국인 상대의 여관업을 시작하였는데 그는 아래층에서 양잡무상(洋雜貿商)을 하면서 2층에「스튜어드 · 호텔(steward Hotel)」을 개업하였다.

- 서울에서 제일 먼저 세워진 양식호텔은 1902년에 독일 여인 손탁이 정동에 세운 손탁호텔을 들 수 있다. 이 건물을 세운 미쓰 손탁(Miss Sontag)은 당시 주한 러시아공사 웨베르(W ber)의 처형으로 1885년 10월 웨베르가 공사로 부임할 때 같이 서울에 왔다. 그녀는 원래 「알사스로렌」출신으로 머리가 뛰어난 여자였다. 한국에 온지 얼마 후에 웨베르의 추천으로 궁정의 외인접대의 일을 맡게 되었는데 아울러 고종 및 양반의 서양식기 · 서양식 실내장식품류의 구입에도 관여하였다. 그리고 가끔씩 왕비에게 초청되어 말상대가 되어 주기도 하였는데 그녀는 영어 · 불어 및 한국어에도 능통하여 왕비는 물론 고종에게까지 안내되기도 하였다. 또한 그녀는 각 방면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는데 특히 외국인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활약하던 배일지(排日紙)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인인 영국인 베델(T. Bethell), 미국인 육영공원의 교사 헐버트(H. B. Hulbert), 전차를 부설한 콜브란(Collbran)같은 사람들과 가까이했다.

손탁은 1895년에 고종으로부터 경운궁(慶運宮)에서 도로 하나 건너편에 있는 서쪽의 땅과 집을 하사 받았다. 당시 그의 저택은 외국인들의 집회소 역할을 하였으며 청일전쟁 후에는 미국이 주축이 되어 조직한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로 이 집이 사용되어 외교의 중심가가 되었다. 그러다가 1902년 10월에는 옛집을 헐고 그 자리에 양관(洋館)을 지어 호텔로 경영하였는데 윗층에는 귀인들의 객실로 사용하였고 아랫층은 보통 객실과 식당으로 사용하였다. 1904년 3월과 1905년 11월에는 이등박문(伊藤博文)이 이 호텔에서 숙박을 했으며 또한 러일전쟁 시에는 후에 영국의 수상이 된 처칠(Churchill)이 이 호텔에서 하룻밤을 숙박하였다. 이 호텔은 1917년 이화학당에서 구입하여 대학과 교실, 기숙사로 사용하다가 1922년에는 이 건물을 헐고 3층건물로 교실, 기숙사, 실험실을 비롯한 각종 부속시설이 포함된 프라이 홀(Frey Hall)을 세웠다.

 

★ [참고사항]

- Hotel의 어원

hospitale(호스피탈레: 순례 또는 참배자, 나그네를 위한 숙소) → hospital → hostel → hotel

- 호텔의 정의

일정한 지불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숙소와 식음료를 제공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사회의 공공사업체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서비스 업체

환대산업(hospitality industry) - 숙박시설, 레스토랑, 사교클럽 등 3가지 산업으로 구성된 것

- 호텔의 등장 : 17C, 영국, 페더즈 호텔(Faethers hotel)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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